우린 모두 각자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

아모스 기자

등록 2026-10-05 20:52

"모든 걸 설명받고 싶은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 영화다.”

 


홍채는 너와 나를 가르는 데이터다. 그리고 영화는 묻는다. 그 데이터에 담기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눈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동공을 감싼 얇은 막에는 실처럼 가는 무늬가 엉켜 있다. 갈색과 회색, 초록과 푸른빛이 섞인다. 그 무늬는 세상에 단 하나뿐이다. 쌍둥이도 다르고, 한 사람의 왼눈과 오른눈도 다르다.

 

마이크 카힐 감독의 〈아이 오리진스(I Origins)〉는 이 작은 무늬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아주 먼 곳까지 간다. 실험실에서 우주로, 진화론에서 영혼으로.

 

이 영화를 관통하는 문장이 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Every person has its own universe)." 홍채는 그 우주의 지도다. 동시에 우주로 들어가는 문이다. 영화는 이 두 얼굴을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는다.

 

2014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이 작품은 제작비 100만 달로 만든 작은 독립영화다. 흥행은 크지 않았고 평단의 반응도 엇갈렸다. 그런데 10년이 넘도록 이 영화를 다시 찾는 사람들이 있다. 

 

홍채, 너와 나를 식별하는 데이터의 집합체

 

주인공 이언 그레이(마이클 피트)는 분자생물학자다. 그는 사람의 눈을 찍는다. 화면 가득 확대된 홍채는 행성의 표면 같다. 분화구와 협곡, 빛의 띠가 보인다.

 

이언에게 홍채는 데이터다. 지문처럼 개인을 가르는 생체 지표다. 색의 분포, 무늬의 간격, 동공의 크기. 모두 숫자로 바꿀 수 있다. 숫자가 된 홍채는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고 비교된다. 너와 나는 그렇게 구별된다.

 

그의 목표도 분명하다. 눈의 진화를 증명하는 것이다. 창조론자들은 오랫동안 눈을 근거로 내세웠다. 이렇게 정교한 기관이 우연히 생겨났을 리 없다는 것이다. 이언은 그 주장을 무너뜨리고 싶다. 눈이 없는 생물에게 눈을 만들어 보이면 신의 자리는 사라진다고 믿는다. 같은 눈을 두고 한쪽은 신의 흔적을, 다른 쪽은 진화의 증거를 본다. 영화는 이 엇갈림에서 시작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언의 카메라다. 그는 눈을 '수집'한다. 그런데 화면 속 홍채는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자료를 모으는 행위가 이미 경외에 가깝다. 이언 자신만 그걸 모른다.

 

눈 없는 생물에게 눈을 만들어 준다는 발상도 상징적이다. 눈이 없는 생물은 빛을 모른다. 빛을 모르니 빛이 없다고 믿는다. 이언의 연구는 그 생물에게 세상을 열어주는 일이다. 그런데 정작 이언 자신은 어떤가. 그는 측정할 수 있는 것만 존재한다고 믿는다. 영화는 조용히 묻는다. 눈이 없는 쪽은 과연 누구인가.

 

눈을 통해 보는 세상, 그 너머의 가치

 

어느 파티에서 이언은 가면을 쓴 여자를 만난다. 보이는 것은 눈뿐이다. 그는 그 눈을 잊지 못한다. 그녀의 이름은 소피(아스트리드 베르제스프리스비)다.

 

얼굴 없이 눈만으로 누군가를 알아본다는 것. 이 장면은 영화 전체의 축소판이다. 이언에게 그 눈은 처음엔 하나의 표본이었다. 사진으로 남기고 비교할 수 있는 데이터. 그러나 그는 곧 깨닫는다. 그 눈 너머에 한 사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데이터가 사람이 되는 순간, 사랑이 시작된다.

 

소피는 이언과 정반대다. 자유롭고 영적이다. 보이지 않는 연결을 믿는다. 이언이 눈 없는 생물에게 눈을 만들겠다고 하자 소피는 묻는다. 눈이 생기면 그 생물은 무엇을 보게 될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감각이 있다면, 우리도 눈 없는 생물과 같은 것 아닐까.

 

이 질문이 영화를 관통한다. 눈은 세상을 보는 도구다. 그러나 눈이 보는 세상이 전부는 아니다. 크리스채니티 투데이의 잭슨 쿠이돈은 이렇게 썼다. "볼 것이 없다면 눈이 무슨 소용인가?" 눈의 가치는 눈 자체가 아니라 눈이 닿는 곳에 있다는 뜻이다.

 

두 사람의 사랑에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 이언은 과학자답게 사랑을 고백한다. 빅뱅 이전에 우리의 원자는 함께 있었다고. "내 원자는 항상 네 원자를 사랑해 왔어(My atoms have always loved your atoms)." 한 관객은 리뷰 전체를 이 한 줄로 채웠다. 더 보탤 말이 없었던 것이다.

 

언어는 물리학이지만 내용은 운명론이다. 이언도 모르는 사이 소피의 언어를 쓰고 있다. 이성이 닿지 못하는 감정을 말하려면, 이성의 단어를 빌릴 수밖에 없다.

 

소피와의 만남 자체도 그렇다. 이언은 우연의 일치를 따라 그녀에게 닿는다. 숫자 ‘11’이 자꾸 눈에 밟힌다. 합리주의자는 이를 확률로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언은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원래 그렇다. 우연을 신호로 읽는 순간, 세상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소피가 사는 세계로 한 걸음 들어서는 것이다.

 

시공간을 넘어 재현되는 홍채의 패턴

 

영화는 하나의 대담한 가정을 세운다. 세상에 하나뿐인 홍채의 무늬가 시간을 건너 다시 나타난다면 어떨까. 같은 홍채는 둘일 수 없다. 그것이 과학의 전제다. 그 전제가 흔들릴 때, 그것은 오류인가 증거인가.

 

데이터는 '일치'라고만 말한다. 그 일치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해석은 사람의 몫이다. 이언은 그 앞에서 처음으로 망설인다. 그가 어떤 답에 이르는지는 영화로 직접 확인하고 느끼기 바란다.

 

이 설정이 영화의 가장 대담한 상상력이다. 윤회라는 오래된 믿음이 데이터베이스라는 가장 현대적인 도구와 만난다. 영혼이 흔적을 남긴다면 아마 눈에 남을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가정하고, 그 가정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이 가정은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름인가, 기억인가, 몸에 새겨진 무늬인가. 데이터의 관점에서 나는 홍채의 패턴이다. 그렇다면 같은 패턴을 가진 누군가는 나인가. 영화는 쉽게 답하지 않는다. 대신 그 질문을 붙들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따라간다. 


낯익은 거리와 사람이 다시 보인다. 마치 처음 보는 눈으로 보는 것처럼. 음악도 이 감각을 거든다. 윌 베이츠와 필 모스먼의 음악은 차갑지 않다. 실험실 장면에서도 어딘가 따뜻하고 몽환적이다. 과학의 공간이 이미 신비의 공간이라는 것을 소리로 먼저 알려준다.

 

데이터가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적 경험

 

이언은 끝까지 과학자다. 실험을 설계하고 확률을 계산한다. 그러나 영화는 숫자 옆에 사람의 표정을 나란히 놓는다. 데이터가 증명하지 못한 것을 한 사람의 눈빛과 눈물이 전한다. 카힐은 어느 쪽이 진실인지 대신 말해주지 않는다.

 

이 대비는 우리 삶과 닮았다. 우리는 사랑을 증명하지 못한다. 그리움의 크기를 숫자로 재지 못한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오래된 친밀감을 느끼는 이유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 감정은 분명히 존재한다. 영화는 바로 그 지점을 겨눈다.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측정되지 않는 경험도 경험이다. 이언이 마주하는 것은 결국 실험 결과가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이다.

 

관객들은 바로 그 감정과 느낌을 오래 기억한다. 한 관객은 엔딩에 흐르는 라디오헤드의 노래를 떠올렸다. "'Motion Picture Soundtrack'을 들을 때마다 아직도 운다." 다른 관객은 이렇게 썼다. "영혼이 만져진 기분이다. 각본, 미장센, 연기, 음악, 모두 완벽하다.“

 

가장 마음을 울리는 리뷰는 따로 있다. 한 관객은 일곱 살 때 사고로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는 장기기증자였고, 살릴 수 있었던 것은 눈뿐이었다. 그는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어머니의 아름다운 눈을 갖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위로가 된다고 썼다.

 

이 리뷰는 영화의 힘을 정확히 보여준다. 윤회를 믿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감각과 느낌. 그것이 사람을 위로한다. 데이터는 연결을 증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연결을 느끼는 사람은 있다.

 

또 다른 관객은 이렇게 썼다. "자정에 이 영화를 다시 볼 거다. 실존적 위기를 좀 느끼고 싶어서." 이 영화는 다 보고 난 뒤에 시작된다. 나는 누구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 영화가 끝나도 그 질문은 남는다.

 

과학자 케런(브릿 말링)의 존재도 눈여겨볼 만하다. 케런은 이언보다 더 냉철한 연구자다. 그런데 그런 케런도 설명되지 않는 일 앞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이성의 얼굴을 한 채 미지를 향해 걸어간다. 과학자가 질문을 멈추지 않을 때, 과학은 신비와 만난다.

 

관객과 평단의 엇갈린 시선

 

늘 그렇지만 관객과 평단의 평가는 갈린다. 로튼토마토의 평론가 지수는 51%, 관객 점수는 70%다. 메타크리틱도 평론가 57점, 사용자 7.4점이다. 평단보다 관객이 더 너그럽다. 머리보다 가슴에 오래 남는 영화라는 뜻이다.

 

호평한 평론가들은 균형을 말한다. 할리우드 리포터의 토드 매카시는 "감정과 지성 사이에서 탁월한 균형을 이룬, 상쾌하게 모험적인 작품"이라 했다. USA 투데이의 클로디아 푸이그는 "과학이 끝나는 곳에서 영성이 이어받는 지점을 탐구한다"고 썼다. 매클래치 트리뷴의 로저 무어는 "사랑에 눈먼 로맨스에서 아린 상실을 지나 깊은 감동에 이르는 롤러코스터"라고 평했다. 시카고 선타임스의 빌 즈웨커는 "신앙과 확증이라는 오래된 논쟁을 파고드는, 사려 깊고 설득력 있는 영화"라고 했다. 더 플레이리스트의 로드리고 페레스는 "과학이라는 회의적 렌즈로 믿음과 영성을 들여다본 매혹적인 작업"이라고 평했다.

 

비판도 만만치 않다. 로튼토마토의 평단 총평은 "야심이 능력을 앞지른다"였다. NPR은 이 영화의 궤적을 "할리우드가 가장 좋아하는 것, 회의에서 믿음으로"라고 꼬집었다. 스크린크러시의 조던 호프먼은 "멋진 SF 전제가 밋밋한 장면과 서투른 전개에 짓눌린다"고 했다. 탈레리코는 두 여성 인물이 "'영적인 모델'과 '과학 기술자'라는 뻔한 대립항"처럼 느껴진다고 아쉬워했다. 덴 오브 긱도 "연기, 촬영, 톤은 완성도가 높지만 이야기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관객도 두 갈래다. 한 리뷰어는 "눈이 정말 영혼의 창이라면?"이라는 대사를 인용하며 비웃었다. 그러나 메타크리틱 사용자 리뷰 137건 중 95건은 긍정적이다. 한 사용자의 말이 이 영화의 관객층을 정확히 짚는다. 

 

"모든 걸 설명받고 싶은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 영화다.”

 

흥미롭게도 비판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도 같은 곳을 본다. 이 영화의 '설명하지 않음'이다. 누군가에게는 허술함이고, 누군가에게는 여백이다. 이 차이가 곧 영화의 주제가 아닐까 싶다. 데이터로 증명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관객은 영화를 평가하면서 이미 그 질문에 답하고 있다. 

 

홍채를 스캔하는 것과 눈을 마주보는 것은 다르다. 스캔은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준다. 눈맞춤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느끼게 해준다. 데이터는 '일치'를 말하고, 눈물은 '연결'을 말한다.

 

어쩌면 이 영화의 제목이 그 답일지도 모른다. 'I Origins'는 '눈(Eye)의 기원'으로도, '나(I)의 기원'으로도 읽힌다. 눈의 기원을 찾던 과학자는 결국 나의 기원을 묻게 된다. 두 질문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영화를 본 뒤 누군가의 눈을 오래 들여다보게 된다면, 카힐의 질문은 이미 당신에게 닿은 것이다. 그 눈 속에도 하나의 우주가 있다. 측정할 수 있는 우주와 측정할 수 없는 우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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