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NEWS 캡처
재판부는 "유죄의 의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무죄를 선고했다.
10월 23일 오후 2시. 서울고법 법정에서 판결 이유 낭독이 이어졌다. 약 16분. 생중계 화면 속 재판장은 차분했다. 결론은 단호했다. 원심 유죄 부분 파기, 피고인들 무죄. 1심이 시장직 상실형을 선고한 지 석 달 만이다.
같은 증거, 같은 증인, 같은 돈. 결론만 정반대로 뒤집혔다. 판결 이유를 끝까지 들으면 이상한 대목이 하나 남는다. 재판부 스스로 의심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만남이 있었고, 여론조사 결과가 공유됐고, 후원자의 돈이 명태균 측으로 갔다. 재판부는 이것이 객관적 증거로 명백히 인정된다고 했다. 그런데도 무죄다. 이 판결은 무엇을 지웠는가.
증인 하나가 흔들리면 사실도 사라지는가
2심 논리의 뼈대는 단순하다. 직접 증거는 명태균의 진술뿐이다. 명태균은 믿을 수 없다. 그러니 공소사실은 증명되지 않았다.
명씨가 믿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데 이견은 별로 없다. 1심도 그 점을 인정했다. 오 시장이 울면서 전화했다는 말, SH공사 사장 자리를 약속했다는 말. 1심은 이런 대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장과 오류를 먼저 걸러냈다.
그다음이 달랐다. 1심은 걸러낸 뒤 남은 것을 봤다. 카카오톡 대화, 만남의 시점, 여론조사 자료가 캠프와 공유된 내역. 명씨의 말이 아니라 기록이다. 1심은 기록과 맞아떨어지는 진술만 골라 믿었다.
2심은 반대로 갔다. 진술 전체를 믿기 어렵다고 본 뒤, 그 진술과 맞물린 객관적 정황까지 함께 밀어냈다. 하지만 거짓말쟁이가 말했다고 계좌 이체 기록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카카오톡 메시지가 지워지지도 않는다. 증인의 신빙성과 물증의 증명력은 다른 문제다.
정치자금 사건의 특성도 봐야 한다. 불법 자금은 영수증을 남기지 않는다. 부탁은 대개 말로, 단둘이 한다. 그래서 법원은 오랫동안 간접 사실을 모아 판단해 왔다. 돈이 오간 시점과 경위, 당사자들의 관계, 앞뒤의 행동. 조각을 맞춰 그림을 본다. 2심은 조각 하나가 흐리다는 이유로 그림 전체를 덮었다.
은행으로 보냈으니 떳떳하다는 논리
판결에서 가장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대목이 있다. 후원자 김한정씨가 명씨에게 돈을 보낸 방식이다. 재판부는 은행 계좌로 떳떳하게 보냈고, 일부는 부가가치세까지 붙였다며 매우 이례적이라고 했다. 범죄라면 이렇게 했겠느냐는 취지다.
뒤집어 보자. 돈이 오간 물증이 있다는 것은 혐의를 뒷받침하는 사실이다. 현금으로 줬다면 증거가 없어 무죄. 계좌로 줬다면 떳떳해서 무죄. 이런 구조라면 어떤 정치자금 사건도 유죄가 되기 어렵다.
부가가치세는 더 묘하다. 부가세가 붙었다는 것은 용역의 대가라는 뜻이다. 무언가를 해주고 받은 돈. 그렇다면 명씨가 김씨에게 해준 용역은 무엇인가. 그 시기 명씨 쪽이 돌린 것은 서울시장 보궐선거 여론조사였다. 재판부가 '이례적'이라고 본 사실은 오히려 돈의 성격을 가리킨다.
범죄가 허술했다는 사실이 범죄를 지우지는 않는다. 들킬 일이 없다고 믿었을 수도 있다. 법이 그렇게 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수법의 대담함을 결백의 증거로 읽는 것. 이것은 증거 판단이 아니라 추측이다.
공짜 여론조사, 그런데 돈은 누가 냈나
2심은 명씨의 동기를 새로 썼다. 오 시장의 부탁 때문이 아니라 자기 정치적 역량을 과시하고, 김종인 당시 비대위원장에게 접근해 입지를 다지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조사 결과가 김종인, 지상욱에게도 전달됐고, 부산시장 선거 조사도 함께 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 가설에는 구멍이 있다. 명씨가 순전히 자기 과시용으로 조사를 돌렸다면, 왜 오 시장의 후원자가 그 비용을 댔는가. 그것도 그전까지 명씨와 친분이 전혀 없던 사람이. 1심이 짚은 지점이 바로 여기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에게 2100만원을 선뜻 보낼 이유가 무엇인가. 오 시장 쪽의 부탁 말고 다른 설명을 찾기 어렵다.
결과를 여러 곳에 돌렸다는 사실도 다르게 읽힌다. 김종인은 당시 당의 비대위원장이었다. 지상욱은 여의도연구원장이었다. 경선 판을 움직이는 자리다. 오세훈이 경쟁력 있다는 숫자가 그 책상에 올라가는 것. 누구에게 이익인가. 결과가 당 지도부로 흘러간 것은 오 시장과 무관하다는 증거가 아니다. 오 시장에게 꼭 필요한 곳으로 갔다는 증거에 가깝다.
동기 판단도 낯설다. 재판부는 2021년 1월 무렵 오 시장에게 당장 여론조사를 의뢰할 동기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그때 오 시장은 10년 가까운 야인 생활 끝에 복귀를 노리고 있었다. 당내 기반이 탄탄한 나경원 후보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내세울 무기는 '본선 경쟁력'이었고, 그 근거는 여론조사 숫자뿐이었다. 동기가 없었다는 말에 그 시절 정치권 누가 고개를 끄덕이겠는가.
1심이 쪼갠 것을 2심은 뭉뚱그렸다
1심 판결은 꼼꼼했다. 여론조사 10건을 하나씩 따졌다. 앞의 5건은 유죄, 나머지는 무죄. 돈도 나눴다. 김씨가 보낸 5차례 가운데 앞의 3차례, 2100만원만 유죄로 봤다. 김씨와 명씨가 가까워진 뒤 오간 돈은 대가성을 단정할 수 없다며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단했다.
이것이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원칙의 실제 모습이다. 증명된 부분과 안 된 부분을 가른다. 의심이 남는 쪽은 버린다. 1심은 이미 그 원칙을 적용했다. 그래서 특검의 징역형 구형보다 가벼운 벌금 1000만원에 이르렀다.
2심은 이 칸막이를 걷어냈다. 명태균을 믿을 수 없다는 판단 하나로 10건을 한꺼번에 정리했다. 조사마다 뒷받침하는 정황이 달랐는데도 그렇다. 형사법의 대원칙을 앞세웠지만, 그 원칙이 요구하는 세밀한 검토는 빠졌다. 원칙은 같아도 쓰는 방식이 달랐다. 하나는 칼로 썰었고, 하나는 망치로 내리쳤다.
판결 안의 결도 고르지 않다. 재판부는 2021년 2월 이후 어느 시점부터 김씨와 명씨가 꽤 막역해졌고, 그래서 김씨가 여러 차례 돈을 줬다고 봤다. 그렇다면 막역해지기 전의 돈은 무엇인가. 1심이 유죄로 본 것이 바로 그 '이전'의 돈이었다. 2심은 이 시간의 순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다.
다루지 않은 증거, 골라 낸 녹음
판결이 무엇을 말했는지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가.
특검은 선고 직후 강하게 반발했다. 김씨가 오 시장 쪽에서 만나보라고 해서 명씨를 처음 만났다고 인정하는 대화 내역이 있다고 했다. 오 시장이 보낸 변호사의 면담 메모도 있다고 했다. 특검은 재판부가 이 증거들에 대해 판단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대납 요청의 출발점을 가리키는 자료다. 이를 비켜간 채 김씨가 명씨 연락처를 강철원을 통해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정리했다면, 판결의 무게중심이 처음부터 기울어 있었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항소심에 새로 들어온 녹음도 걸린다. 항소심 재판부는 김씨가 제출한 2021년 3월 명씨와의 통화 녹음파일 3건을 명씨 진술의 신빙성을 다투는 탄핵증거로 채택했다. 특검은 대납 시점으로 지목된 시기의 녹음이 정작 제출되지 않았다며 선별 제출을 의심했고, 최소 35개의 통화녹음을 압수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1심 내내 나오지 않던 녹음이 항소심에서, 그것도 유리한 일부만 나온 셈이다. 재판부는 이 녹음을 명씨 진술을 깎는 데 썼다. 나머지 녹음에 무엇이 담겼는지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증언의 동기를 따진 대목도 한쪽으로 기운다. 재판부는 명씨가 오 시장의 고소 발표 뒤에야 본격적으로 진술했고, 캠프와 틀어진 뒤 섭섭함을 품었다고 짚었다. 진술이 오염됐을 가능성을 꼼꼼히 따진 것이다. 그런데 같은 잣대가 피고인 쪽 증거에는 닿지 않았다. 골라서 낸 녹음의 오염 가능성은 왜 같은 무게로 따지지 않았나.
두 주 전 윤석열 판결과 같은 그림
이 판결은 홀로 서 있지 않다. 같은 재판부는 지난 7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명태균 여론조사 사건에서도 1심 유죄를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명씨가 제공한 조력을 정치적 이익으로 봤다. 무상 제공에 대한 의사 합치를 증명할 증거도 부족하다고 했다.
두 판결을 겹쳐 보면 하나의 그림이 나온다. 명태균은 스스로 조사를 돌리고 스스로 결과를 뿌린 사람이다. 정치인은 그것을 받아봤을 뿐이다. 받은 사람은 부탁하지 않았다. 대신 돈을 낸 사람은 자발적으로 냈다. 이 틀 안에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것이 왜 위험한가. 이 논리는 그대로 매뉴얼이 된다. 브로커가 알아서 조사를 돌린다. 후보는 결과를 받아본다. 후원자가 브로커에게 돈을 보낸다. 셋 사이에 오간 부탁만 녹음되지 않으면 된다. 정치자금법이 막으려던 바로 그 우회로다. 벌써 정치 컨설턴트를 하겠다, 여론조사 업체를 차리겠다는 씁쓸한 농담이 돈다. 판결이 남긴 신호가 그렇게 읽히고 있다는 뜻이다.
대법원이 답해야 할 질문
특검은 상고하겠다고 밝혔다. 이제 공은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대법원은 사실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다투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증거 판단이 경험칙에 어긋났는지, 심리를 다했는지는 따진다. 이번 사건에는 대법원이 답해야 할 질문이 쌓여 있다.
핵심 증인의 신빙성이 낮다는 이유로 그와 독립된 객관적 정황까지 배척할 수 있는가. 계좌 이체와 부가세라는 물증을 무죄의 근거로 읽는 것이 경험칙에 맞는가. 특검이 내세운 결정적 정황을 판단하지 않고 넘어간 것은 심리를 다한 것인가. 선별 제출이 의심되는 녹음을 탄핵증거로 쓰면서 나머지에 눈감은 것은 공정한가.
오 시장은 차기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그래서 더 엄격해야 한다. 권력에 가까운 피고인일수록 판결은 의심받지 않을 만큼 단단해야 한다. 이번 2심은 그 단단함을 보여주지 못했다.
재판부는 "유죄의 의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의심을 인정하고도 무죄를 택할 수는 있다. 그것이 형사재판의 원칙이다. 다만 그 결론에 이르려면 의심을 하나씩 풀어내야 했다. 1심은 그렇게 했는데 2판결은 그 의심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덮었다. 원칙은 피고인을 지키라고 있다. 질문을 지우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대법원이 그 질문을 다시 꺼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