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이 있다. 거친 파도가 바위를 때린다. 사내들이 그물을 들고 바위 위에 섰다. 그물 끝에서 바다사자 한 마리가 고개를 쳐든다. 도망칠 곳은 없다. 사진 속 장면은 짧다. 그러나 그 뒤에 숨은 이야기는 길고 무겁다. 한 종이 지구에서 사라진 이야기다.
독도의 첫 주인은 사람이 아니었다. 강치였다. 강치는 바다사자다. 학명은 잘로푸스 자포니쿠스(Zalophus japonicus). 수컷은 몸길이 2.5m, 몸무게 500kg이 넘었다. 짙은 황갈색 몸에 위엄이 있었다. 동해의 최상위 포식자였다.
우리 조상은 이 동물을 '가지어(可支魚)'라 불렀다. 가지, 가제, 가재라고도 했다. '강치'라는 이름은 조선 후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처음 나온다. 1950년대 독도의용수비대원들도 '가제'라고 불렀다. 독도 서도 북쪽에는 지금도 '큰가제바위', '작은가제바위'가 있다. 이름이 곧 기록이다.
조선은 오랫동안 울릉도와 독도를 비워두었다. 이른바 공도(空島) 정책이다. 사람이 없으니 강치에게는 낙원이었다. 바위에서 쉬고, 동굴에서 새끼를 낳았다. 동해 연안에 수만 마리가 살았다. 그러나 그 오랜 평화는 깨져버렸다.
1905년, 학살의 시작
1904년, 일본 어민들이 독도에 들어왔다. 목적은 강치였다. 가죽은 돈이 됐다. 기름도, 고기도, 뼈도 돈이 됐다.
이듬해인 1905년 2월 22일. 일본은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했다. 우리 땅을 일방적으로 자기 땅이라 선언한 날이다. 같은 해 '다케시마어렵회사'가 세워졌다. 강치잡이가 본격적인 사업이 됐다.
방법은 잔인했다. 그물로 가두고, 몽둥이로 때리고, 총을 쐈다. 암컷과 수컷을 가리지 않았다. 새끼와 어미도 가리지 않았다. 이 회사는 1905년부터 8년 동안 1만 4천여 마리를 잡았다. 죽은 강치가 썩는 냄새가 울릉도까지 퍼졌다는 증언도 남아 있다. 이것은 어업이 아니었다. 사냥도 아니었다. 학살이었다.
감정만으로는 부족하다, 숫자를 보자
부산대 이상헌 교수 연구팀은 해양수산부 지원을 받아 강치의 개체 수 변화를 추정했다. 출생률, 자연사망률, 포획사망률을 넣어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결과는 국제학술지 『해양과학공학저널(JMSE)』에 실렸다.
— 1904년 이전, 약 3만 마리. 8년 뒤, 약 8,500마리. 1930년, 790마리. — 1940년, 227마리.

포획이 시작되고 단 8년. 개체 수가 30% 아래로 떨어졌다. 그 뒤로도 사냥은 멈추지 않았다. 결론은 분명하다. 강치를 멸종으로 몰아간 것은 무분별한 남획이었다. 이제 이 사실은 과학이 뒷받침한다.
마지막 생존 기록은 1974년이다. 일본 홋카이도 레분섬에서 어린 개체 한 마리가 잡혔다. 그 뒤로 강치는 나타나지 않았다. 1991년 일본 환경청이, 1994년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이 멸종을 인정했다. 한국 정부도 2011년 멸종을 공식화했다. 3만에서 0으로. 한 세기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본은 책임을 인정했을까
일본은 1918년 '조수보호법'을 만들었다. 야생동물 밀렵을 막는 법이다. 그런데 바다사자 같은 해양포유류는 빠졌다. 보호 대상이 된 것은 2002년이다. 강치가 사라지고 한참 뒤였다.
일본 정부는 강치 남획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낸 적이 없다. 오히려 강치를 홍보에 쓴다. 시마네현은 강치를 지역 마스코트로 삼았다. 귀여운 캐릭터로 만들어 '친구'라고 부른다. 강치잡이 역사를 소개하면서도 남획 이야기는 빼놓는다. 2020년에는 도쿄 '영토·주권 전시관'에 강치 모형까지 세웠다.
(위)나무위키,(아래)MBC NEWS 캡처화면=지나친 포획과 남획으로 멸종에 이르게 해 놓고 이제는 '강치는 우리의 친구'라고 홍보하는 일본의 역겨운 이중성
2015년 MBC 뉴스데스크는 이를 꼬집었다. 강치를 학살한 나라가 이제 강치를 친구라 부르며 독도 홍보에 쓴다는 것이다. 강치는 독도 침탈의 첫 번째 피해자였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얼굴로 홍보물을 만든다. 이보다 뻔뻔한 일이 있을까.
오히려 일본 일각은 한발 더 나간다. 한국이 독도를 요새화하면서 강치가 사라졌다는 주장한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기후변화, 환경오염, 한국의 독도 요새화를 멸종 요인으로 함께 든다. 물론 한국도 강치를 잡은 적이 있다. 1947년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가 표본으로 몇 마리를 잡았다. 독도의용수비대원들도 식량이 떨어지면 강치를 먹었다고 증언했다. 이것은 감출 일이 아니다.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 그러나 규모가 다르다. 일본은 8년 동안 1만 4천 마리를 잡았다. 3만 마리가 227마리로 줄어든 것은 일제강점기의 일이다. 이미 무너진 개체군에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시기였다.
요새화 주장도 근거가 약하다. 독도경비대는 동도 위쪽에 있다. 강치가 주로 살던 곳은 서도 북쪽의 가제바위다. 2025년 KBS 다큐 〈독도의 무명씨들〉에 나온 제주 해녀들은 1960년대까지 독도에서 강치를 쉽게 봤다고 말한다. 강치는 물질하는 해녀를 해치지 않았다. 해녀가 다가가도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던 강치, 그래서 더 쉽게 죽었다
강치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나. 먼저 기억이다. 해양수산부는 2007년 강치를 해양보호생물로 지정했다. 2015년에는 독도에 강치 벽화를, 울릉도에 강치 동상을 세웠다. 2019년에는 독도 강치 뼈에서 처음으로 유전자 정보를 확인했다. 흩어진 흔적을 모으는 일이다.
다음은 정확한 기록이다. 감정적인 비난만으로는 일본의 왜곡을 이길 수 없다. 숫자와 문헌, 증언이 필요하다. 이번 연구가 의미 있는 이유다. 멸종 원인을 과학의 언어로 증명했다. 마지막은 지금 살아 있는 생명이다. 동해에는 점박이물범이 있다. 고래도 있다. 정부는 현재 88종을 해양보호생물로 관리한다. 강치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지금 지켜야 한다.
일부에서는 캘리포니아바다사자 같은 근연종을 들여와 독도에 풀자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강치와 종이 다르다. 겉모습이 닮았다고 같은 동물은 아니다. 잃어버린 것은 대신할 수 없다.
다시 그 흑백 사진으로 돌아간다. 그물에 걸린 강치가 고개를 쳐들고 있다. 그 눈은 무엇을 보았을까. 독도를 둘러싼 다툼은 지금도 이어진다. 그러나 이 섬에는 이미 답이 하나 있다. 독도의 옛 주인은 누구였나. 강치였다. 그 주인을 몰아낸 것은 누구였나. 일본이었다. 일본은 강치를 마스코트로 기억하고, 우리는 강치를 증거로 기억한다. 일본은 지우려는 기억이고, 우리는 남기려는 기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