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쓰는 모든 말에는 살아남은 이유가 있다

신정희 기자

등록 2026-10-09 23:09

『어쩌다 한국어』 | 한성우 지음 | 알렙



'빵'은 우리말일까. 대부분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한다. 매일 먹고 매일 부른다. 찐빵, 호빵, 건빵이 있다. 빵순이와 빵지순례도 있다. 그런데 이 말은 포르투갈에서 왔다. ‘pão’가 일본에서 '판'이 되고, 바다를 건너와 '빵'이 되었다. 국어학자 한성우의 새 책 『어쩌다 한국어』는 이런 말들의 이력서를 쓴다.


우리는 흔히 '순우리말'을 귀하게 여긴다. 한자어나 외래어는 어딘가 오염된 말처럼 본다. 저자는 이 생각에 질문을 던진다. 한국어는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다. 여러 언어가 만나 섞이고 자란 생태계다.


만주어, 산스크리트어, 몽골어, 한자어, 일본어, 영어. 모두 한국어의 저수지로 흘러들었다. 저자는 이 흐름을 50편의 이야기로 따라간다.


고무, 구두, 냄비, 담배. 저자는 이 넷을 '어숨찐 4인방'이라 부른다. 어원을 숨긴 진짜 외래어라는 뜻이다. 고무는 프랑스어나 네덜란드어에서 일본을 거쳐 왔다. 냄비는 일본어 '나베'와 이어진다. 담배는 '타바코'가 변한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고무줄 잣대', '냄비근성', '줄담배'라고 말한다. 외래어가 관용구 속까지 들어와 앉았다.


말의 출신지가 외국이라고 끝까지 남의 말은 아니다. 생활 속에서 쓰이고 다른 말과 붙기 시작하면 우리말이 된다. 이 책은 순수함을 가려내지 않는다. 낯선 말이 어떻게 뿌리내렸는지를 보여 준다. 지금, 방금, 금방, 점심. 모두 한자어다. 그런데 이 말들이 외국어처럼 들리는가. 그렇지 않다. 이미 너무 깊이 들어와 있다.


저자는 한자어가 고유어를 밀어냈다고만 보지 않는다. 빈자리를 채우며 함께 살아왔다고 본다. '점심'이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뜻으로 쓰이는 것도 그 증거다. 들어온 말이 한국어 안에서 제 뜻을 새로 얻었다.


'내일'은 더 흥미롭다. 한자로는 '來日'이라 쓴다. 하지만 옛 문헌과 방언을 보면 고유어였을 가능성도 있다. 낼, 니알, 니얼, 냘, 녈. 방언 속 모습은 오히려 한자와 멀어 보인다.


결론은 쉽게 나지 않는다. 저자가 짚는 것은 다른 데 있다. 고유어와 한자어를 적으로 볼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지끔은 바쁘니 냘 겸심 때 와."


이 한 문장에서 출신을 따지는 사람은 없다. 그저 우리가 쓰는 우리말이다.


이 책의 가장 새로운 대목은 방향을 뒤집는 데 있다. 지금까지 한국어는 주로 받아들이는 쪽이었다. 이제는 내보내는 쪽이기도 하다.


오빠와 언니가 국경을 넘었다. 영어권에서는 ‘oppa’, ‘unnie’로 쓴다. 중국에서는 '오우바', '오우니'로 받아들인다. 발음은 조금 달라졌다. 외래어가 다른 언어에 들어갈 때 늘 겪는 일이다.


'화이팅'은 더 극적이다. 영어 ‘fighting’에서 출발했지만 영어권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다. 한때는 엉터리 영어라며 부끄러워했다. 그런데 지금은 ‘Hwaiting’으로 세계에 나간다. 한국에서 만든 말이 다른 언어의 외래어가 된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외거어(外去語)'라 부른다. 외래어가 밖에서 들어온 말이라면, 외거어는 밖으로 나간 우리말이다. 대박, 치맥도 같은 길을 걷는다.


빤쓰와 난닝구. 팬티와 러닝셔츠. 앞의 말은 나쁘고 뒤의 말은 좋은가. 저자는 그렇게 나누지 않는다. 모두 외래어다. 차이는 들어온 길과 살아온 시대뿐이다.


공장과 건설 현장의 '데파', '아루'도 마찬가지다. 영어 ‘taper’, ‘radius’가 일본어를 거쳐 들어왔다. 일본어 잔재라고 손가락질하기 쉽다. 하지만 저자는 먼저 묻자고 한다. 그 말은 왜 살아남았는가. 무엇이 그 말을 필요로 했는가.


말은 명령으로 바뀌지 않는다. 편하고, 잘 통하고, 필요한 말이 남는다. 기준을 정하는 것은 학자나 기관이 아니다. 실제로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우리말을 '정글'에 빗댄다. 고유어, 한자어, 일본을 거친 말, 서양에서 온 말이 뒤섞여 숲을 이룬다. 영어도 다르지 않다. 라틴어와 프랑스어가 섞인 거대한 정글이다. 중요한 것은 순수함이 아니다. 쓰는 사람에게 필요한 말이 살아 있는가다.


이 책은 어원을 문헌 속에 가두지 않는다. 일상에서 시작한다. 구성부터 그렇다. 느끼고 표현하다. 더불어 살아가다. 먹고 마시다. 입고 꾸미다. 날로 써서 편안해지다.


글 제목도 재치가 넘친다. '딱한 단어의 착한 여정', '수리수리마수리의 열반', '짜장과 우동, 그리고 라면과 짬뽕의 짬뽕말', '깡통과 깡패의 따로 또 같이'. 서로 무관해 보이던 말들이 만나 저마다의 여정을 드러낸다. '착한 가격'은 틀린 말일까. '낭만'은 정말 우리말일까. 질문 하나가 역사와 문화를 지나 다시 오늘의 말로 돌아온다.


저자는 방언과 말소리를 연구해 온 국어학자다. 현장을 다니며 말을 모았다. 『우리 음식의 언어』, 『노래의 언어』, 『서울의 말들』 등 말을 주제로 꾸준히 책을 써 왔다. 쉬운 문장과 넉넉한 입담은 그 경험에서 나온다.


책을 덮으면 익숙한 말이 다르게 들린다. 메뉴판, 스포츠 중계, 가족의 대화, 온라인 신조어. 모두 한국어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현장이다. 


낯선 말을 만나면 우리는 먼저 맞고 틀림을 묻는다. 이 책은 질문을 바꾸게 한다. 왜 들어왔는가. 어떻게 달라졌는가. 왜 살아남았는가. 순수한 말은 없다. 하지만 살아 있는 우리말은 있다. 빵 한 입에도 세계가 들어 있고, 오빠 한마디에도 한국이 실려 나간다. 사전에서 뜻을 찾았다면, 이제 그 말이 여기까지 온 길을 읽을 차례다.



신정희

신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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