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에서 바람을 듣던 시인, 앤 카슨 2026년 노벨문학상 수상!

신정희 기자

등록 2026-10-08 21:48

스웨덴 한림원 "고전 전통과의 장난스러운 대화를 통해 현대 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한 대담하고 창의적인 작품"

스웨덴 한림원



"고전 전통과의 장난스러운 대화를 통해 현대 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한 대담하고 창의적인 작품." — 스웨덴 한림원, 2026년 노벨 문학상 선정 이유


해마다 10월이면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리고 해마다 비켜 갔다. 캐나다 시인 앤 카슨의 이야기다. 2026년, 마침내 그 이름이 불렸다.


8일(현지시간) 스웨덴 한림원은 캐나다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인 앤 카슨을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했다. 카슨은 올해 76세다. 그는 고대 세계와 신비주의를 현대적으로 비틀어 사랑과 욕망, 절망을 써 온 작가다. 


수상 소식은 어디서 들었을까. 아이슬란드였다. 한림원 종신 사무총장 잉리드 칼베리는 카슨과 잠시 통화했다고 밝혔다. 카슨이 전한 말은 짧았다. 지금 아이슬란드에서 바람 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림원은 카슨이 수상 소식에 놀라워했다고 전했다. 


상금은 1200만 스웨덴 크로나, 약 120만 달러다. 시상식은 12월 10일 스톡홀름에서 열린다. 알프레드 노벨의 기일이다. 메달은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이 건넨다. 


이변은 아니었다. 발표 직전 베팅 시장과 전문가들은 카슨과 중국 소설가 찬쉐를 유력한 두 후보로 꼽았다. CBC는 발표 며칠 전 미국 예측시장 칼시에서도 카슨이 선두권에 있다고 보도했다. 가디언은 이미 2020년에 카슨을 유력 수상자로 거론했다. 기다림이 길었을 뿐이다. 


한림원은 카슨의 문학을 어떻게 읽었나. 열쇠는 '단어'다.


노벨위원회 안데르스 올손 위원장은 카슨의 작품 세계가 거의 전부 한 지점에 모여 있다고 설명했다. 단어에 집착하는 문헌학자와 새로운 의미를 갈망하는 시인이 만나는 자리다. 카슨 스스로도 단어의 어원이 모든 작업의 출발점이라고 말해 왔다. 


학자와 시인. 보통은 따로 가는 길이다. 카슨은 둘을 한 몸에 묶었다. 고대 그리스어 한 단어를 붙들고 오래 들여다본다. 그 단어가 품은 균열에서 현대의 감정을 끌어낸다.


올손 위원장은 1986년 장편 에세이 『에로스, 달콤씁쓸한』이 카슨 문학의 토대를 놓았다고 평가했다. 사포의 시 한 구절에서 출발해 사랑과 결핍을 파고든 책이다. 학술서이면서 시였다. 이후 카슨이 걸어간 길이 이 책에 이미 들어 있었다. 


선정 이유의 '장난스러운'이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하다. 고전을 떠받드는 대신 고전과 논다. 경건함 대신 유머로 다가간다. 글로브앤드메일은 이미 2000년에 카슨을 '장난스럽다'고 부른 평가를 소개했다. 현대와 고대를 녹여 섞는 방식 때문이었다. 26년 뒤, 한림원도 같은 단어를 골랐다. 


카슨의 책은 분류가 어렵다. 그래서 새롭다.


대표작은 1998년 『빨강의 자서전』이다. 그리스 신화 속 붉은 날개 괴물 게리온을 현대 소년으로 다시 불러낸 운문 소설이다. 한림원은 이 작품에서 게리온이 어머니에게 헌신하는 여린 주인공으로 바뀌었다고 짚었다. 형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상처를 지닌 그는 오만한 헤라클레스와 사랑에 빠진다. 신화 속 악당이 상처 입은 사춘기 소년이 된다. 고전과의 대화란 이런 것이다. 


2001년 『남편의 아름다움』은 무너지는 결혼을 29편의 탱고로 풀었다. 카슨은 이 책으로 영국 T.S. 엘리엇상을 받은 첫 여성이 됐다. 


2010년 『녹스(Nox)』는 책이라는 형식 자체를 바꿨다. 한림원은 이 작품을 문학이자 조각에 가까운 창작물로 소개했다. 상자에 담긴 아코디언식 접이 책이다. 세상을 떠난 남동생에게 바친 사진과 편지, 글이 펼쳐진다. 슬픔을 읽는 것이 아니라 펼치게 만든다. 


최근작도 같은 결이다. 마릴린 먼로의 삶과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네』를 겹친 『트로이의 노마 진 베이커』는 2020년 캐나다 총독문학상 시 부문을 받았다. 2024년 시집 『잘못된 노마』는 미국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받았다. 


번역도 카슨 문학의 큰 축이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을 현대 영어로 옮겼다. 번역이면서 재창작이다. 시, 에세이, 번역, 오페라 대본, 퍼포먼스. 카슨에게 장르는 경계가 아니라 재료다.


카슨의 책 날개에는 늘 한 줄 약력이 붙는다. 캐나다에서 태어났고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쳐 생계를 꾸린다는 문장이다. CBC는 이 짧은 소개가 시인이자 번역가, 고전학자로서 그가 쌓은 세계적 명성을 다 말해 주지 못한다고 썼다. 


카슨은 1950년 6월 21일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은행원이었고, 캐나다의 여러 소도시를 옮겨 다니며 자랐다. 고등학교 라틴어 교사가 고대 그리스어를 처음 알려 주고 따로 가르쳤다. 


1981년 고전학 박사 논문 「오디 에트 아모 에르고 숨(Odi et Amo Ergo Sum)」을 발표했다. 이후 맥길대, 미시간대, 뉴욕대, 프린스턴대 등에서 고전학과 비교문학, 창작을 가르쳤다. 


이력이 화려하다. 맥아더 '천재상', 구겐하임 펠로십, 푸시카트상을 받았다. 그리핀 시 문학상의 첫 수상자이자 처음으로 두 번 받은 시인이다. 2020년 스페인 아스투리아스 공주상, 2021년 펜/나보코프상도 받았다. 


카슨은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로 유명하다. 그런 그가 2024년에 병을 털어놓았다. 런던리뷰오브북스에 실은 에세이에서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11월 프린스턴대 강연에서는 진단 이후 무너져 가는 자신의 필체를 이야기했다. 회고와 번역, 미술 비평, 퍼포먼스를 섞은 강연이었다. 병마저 작품의 재료로 삼는다. 카슨다운 방식이다. 


캐나다 언론은 들떴다. 글로브앤드메일은 카슨이 이 상을 받은 세 번째 캐나다인이라고 보도했다. 2013년 단편소설가 앨리스 먼로 이후 13년 만이다. 이 신문은 동료 작가의 평가도 다시 꺼냈다. 마이클 온다치는 카슨을 "오늘날 영어로 쓰는 가장 흥미로운 시인"이라 부른 바 있다. 


캐나라 공영방송사 CBC는 1984년 첫 시집 이후 1986년 『에로스, 달콤씁쓸한』이 나오며 카슨의 명성이 캐나다 안팎으로 퍼졌다고 정리했다. 그동안 캐나다의 노벨상 후보라 하면 마거릿 애트우드가 먼저 꼽혔다. 더컨버세이션은 애트우드와 카슨이 다른 길로 세계 무대에 섰다고 분석했다. 카슨은 시와 번역, 학계의 네트워크를 통해 실험적인 글이 어떻게 퍼질 수 있는지 보여 줬다는 것이다. 


이번 선정은 다른 의미도 있다. 평론가들은 올해 수상자가 여성일 것으로 예상했다. 한림원이 서구 백인 남성을 지나치게 많이 뽑아 왔다는 비판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1901년 이후 수상자 122명 가운데 여성은 19명뿐이다. 카슨은 열아홉 번째 여성 수상자가 됐다. 2024년 한강에 이어 2년 만의 여성 수상이다. 


카슨은 자신의 글쓰기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CBC 인터뷰에서 그는 글쓰기를 "파국을 향한 시도"라고 불렀다. 대부분은 상투어로 버티다가 몇 개의 독창적인 생각을 덧대 살아 있다고 느끼려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겸손한 말이다. 그러나 세계는 그 '몇 개의 생각'에 주목했다. 2500년 전 그리스어 한 단어가 오늘의 사랑과 상실을 말하게 됐다.


고전은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누군가 말을 걸면 대답한다. 앤 카슨은 평생 그 대화를 이어 왔다. 한림원은 그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슬란드에서 바람을 듣던 시인처럼.



신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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