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김성은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박사(단독 제1저자), 김경택 서울대 화학부 교수(공동 교신저자), 김소연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공동 교신저자)
서울대 김소연·김경택 교수팀, 고리형 고분자로 계면 혼합 폭 2.6배 증가 규명 ’위상학적 엔트로피’ 효과 직접 관측… 국제학술지 ‘ACS Central Science’ 게재
화학 성분은 그대로 둔 채 실 모양의 고분자를 고리 형태로 변형하는 것만으로 잘 섞이지 않던 플라스틱 층 경계면을 자연스럽게 섞이도록 만드는 기술이 세계 최초로 개발됐다. 약 40년 전 이론으로만 제기됐던 ‘위상학적 엔트로피(topological entropy)’ 효과가 실제 고분자 계면에서 직접 입증된 것이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생물공학부 김소연 교수와 자연과학대학 화학부 김경택 교수 공동 연구팀은 분자의 연결 형태인 ‘위상(topology)’ 제어를 통해 고분자 계면의 혼화성을 획기적으로 향상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연구 결과는 미국화학회(ACS)가 발간하는 세계적 학술지 ‘ACS Central Science’에 게재됐다.
식품 포장재, 기능성 필름, 디스플레이 등 다수의 플라스틱 제품은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고분자 층을 겹쳐 제작된다. 하지만 화학적으로 같은 성분이라도 분자량 차이가 크면 층간 혼화성이 떨어져 쉽게 들뜨거나 벗겨지는 한계가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금까지는 별도의 화학 접착 매개 물질(상용화제)을 첨가하는 방식이 주로 쓰였다.
연구팀은 끝이 연결된 고리형 고분자에 주목했다. 1986년 학계에서는 고리형 고분자가 선형 고분자와 만날 때 긴 실이 고리 안을 통과하며 얽히는 ‘스레딩(threading)’ 현상이 일어나 계면 혼화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예측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순도 높은 고리형 고분자의 합성 및 측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실증 작업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연구팀은 정밀 합성 기술로 길이가 균일한 선형 및 고리형 폴리락타이드(PLA)를 제조한 뒤, 이를 중수소 치환 PLA 박막 위에 쌓아 이중층 필름을 제작했다. 이어 한국원자력연구원 하나로(HANARO) 연구용 원자로의 'REF-V' 중성자 반사율 측정 장치를 활용해 경계면의 혼합 정도를 나노미터(nm) 단위로 정밀 분석했다.
분석 결과, 선형 고분자끼리 조합했을 때 1.9nm에 불과했던 계면 혼합 폭은 한쪽을 고리형으로 교체하자 5.0nm로 약 2.6배 증가했다. 특히 고리형 구조가 유발하는 효과는 단순 사슬 길이를 두 배 늘리는 것보다 계면 혼화성 측면에서 약 22배 큰 것으로 분석됐다. 화학적 성분이나 열처리 조건이 아닌 순수 분자 ‘모양’만으로 계면 접착 성능을 제어할 수 있음을 입증한 셈이다.
이번 연구는 첨가제 없이 분자 구조 변경만으로 플라스틱 층간 안정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새로운 설계 원리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향후 범용 고분자로 확대 적용될 경우 기능성 필름, 생분해성 플라스틱, 고성능 열계면소재(TIM) 등 다양한 산업 분야의 성능 개선에 기여할 전망이다.
김소연 교수는 "40년간 이론으로만 존재했던 예측을 실험으로 처음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이어 김경택 교수는 "정밀 합성 기술을 바탕으로 향후 범용 고분자까지 연구를 확장해 계면 공학의 새로운 도구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한국연구재단 중견연구자지원사업과 삼성전자 삼성미래기술육성센터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