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을 가르는 '숲속의 비행사'…멸종위기 하늘다람쥐의 경고

장기영 기자

등록 2026-08-28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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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27일 오전, 네팔과 중국 티베트를 잇는 히말라야 접경지대에서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무너져 내렸다. 해발 5200미터 높이의 빙하 덩어리가 추락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마을 전체를 통째로 휩쓴 지진 같은 산사태였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빙하호와 흙이 쌓여 만든 자연 댐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물살이 마을을 덮쳤고, 이 충격으로 규모 5.2 지진에 해당하는 진동까지 발생했다. 


미국 지질조사국은 처음엔 이를 지진으로 분류했지만, 추가 분석 끝에 빙하 붕괴와 토석류가 하류에 연쇄적인 재앙을 일으킨 사건으로 정정했다. 사고 이틀째 집계된 인명피해는 1700명을 훌쩍 넘었고, 이 지역 빙하호 중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잠재적 위험 호수가 약 47개 더 남아 있다. 


네팔은 전 세계 탄소 누적 배출량의 0.1%도 채 배출하지 않은 나라다. 산업화의 역사도, 화석연료로 쌓아올린 부(富)의 역사도 이 나라에는 없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로 가속화되는 빙하 붕괴, 빙하호 범람, 돌발 홍수의 최전선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네팔이다. 


배출하지 않은 자가 가장 먼저, 가장 가혹하게 대가를 치르는 이 역설 앞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피해와 책임은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 비대칭은 인간 사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기후위기는 인간이 그어놓은 국경과 책임의 경계를 가볍게 넘어, 인간이 만들지 않은 조건 위에서 살아가는 다른 생명들에게도 똑같이, 어쩌면 더 가혹하게 번져간다. 밤의 숲에서 나뭇가지 사이를 활공하는 하늘다람쥐도 그런 존재 중 하나다.


밤의 숲에서 하늘다람쥐는 날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비행이 아니라 '낙하의 유예'다. 나무 꼭대기에서 몸을 던지는 순간부터 맞은편 가지에 닿는 순간까지, 하늘다람쥐는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중력과 협상한다. 비막을 펼쳐 낙하 속도를 늦추고, 꼬리로 방향을 조정하며, 정확히 계산된 포물선을 그린다. 새처럼 하늘에 머무를 수 없는 존재가 그럼에도 허공을 건너는 방법—그것이 활공이다.


이 사실은 사소해 보이지만, 하늘다람쥐라는 존재의 조건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다. 하늘다람쥐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정확히는, 그의 자유는 철저히 조건적이다. 그는 나무와 나무 사이의 거리가 일정 범위 안에 있을 때만 이동할 수 있다. 그 거리를 넘어서는 순간, 그는 땅으로 내려와야 하고, 땅은 그에게 죽음의 공간이다. 그러니까 하늘다람쥐의 활공 능력이란, 자유의 증거라기보다는 얼마나 좁은 조건 위에서 생존이 성립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에 가깝다. 


네팔의 빙하가 지구 평균기온 상승 몇 도라는 좁은 임계값 위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듯, 하늘다람쥐의 생존도 나무와 나무 사이의 몇 미터라는 좁은 조건 위에서만 성립한다. 조건이 무너지면, 그 존재도 함께 무너진다.


산림 파편화가 하늘다람쥐에게 치명적인 이유는 단지 '서식지가 줄어들어서'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하늘다람쥐라는 종의 정체성 자체가 '연결성' 위에서만 성립한다는 데 있다. 고립된 숲에 갇힌 개체군은 당장 죽지 않는다. 몇 세대는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러나 유전자의 흐름이 끊긴 채로 시간이 흐르면, 그 개체군은 서서히, 그러나 필연적으로 소멸한다. 근친교배, 면역력 저하, 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력 상실—이 모든 것은 갑작스러운 재앙이 아니라 '고립'이라는 조건이 만들어내는 조용하고 예정된 결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다람쥐를 넘어선 질문과 마주친다. 존재한다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분리 가능한 개념인가. 우리는 흔히 생명을 개체 단위로 생각한다. 한 마리의 하늘다람쥐, 한 그루의 나무, 한 사람의 인간. 그러나 하늘다람쥐의 생태는 그 개체 중심적 사고가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드러낸다. 한 마리의 하늘다람쥐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이 의미를 갖는 것은 오직 다른 개체와의 유전적 교류, 숲이라는 연속된 구조, 다른 종들과 얽힌 생태적 관계망 속에서다. 개체는 관계의 산물이지, 관계의 전제가 아니다.


이것은 생물학적 사실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존재론이다. 우리가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인간의 정체성도 고립된 실체로서가 아니라 언어, 기억, 관계, 공동체라는 연속된 구조 속에서만 성립한다. 다만 인간은 그 사실을 종종 잊는다. 자립, 독립, 개인주의라는 언어로 스스로를 포장하면서, 실은 우리 역시 연결이 끊기면 서서히 소멸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외면한다. 하늘다람쥐가 고립된 숲에서 조용히 사라지듯, 인간도 관계의 그물망에서 떨어져 나가면 어떤 방식으로든 스러진다. 다만 그 소멸의 속도가 다를 뿐이다.


이 칼럼에서 가장 오래 머물고 싶은 지점은 고사목(枯死木)이다. 죽은 나무, 산림 정책의 언어로는 '위험목', 효율의 언어로는 '제거 대상'. 그러나 하늘다람쥐에게 고사목은 집이다. 딱따구리가 뚫어놓은 구멍, 세월이 만든 틈, 썩어가는 나무의 부드러운 속살, 그것들이 번식지가 되고 은신처가 된다.


우리 사회는 대체로 '죽은 것'을 쓸모없는 것과 동일시한다. 정돈된 숲, 효율적인 조림, 관리 가능한 자연—이것이 근대적 산림 경영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하늘다람쥐의 생태는 그 이상 자체에 균열을 낸다. 살아있는 나무만으로 이루어진 숲은 완결된 생태계가 아니라 오히려 결핍된 숲이다. 죽음이 제거된 자리에는 살아갈 곳을 잃은 생명들이 남는다.


이것은 단지 산림 정책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더 넓게 보면, 이것은 우리가 '가치 있음'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살아있고, 자라고, 생산적인 것만이 가치 있다고 믿는 사고방식은 인간 사회에서도 낯설지 않다. 은퇴한 사람, 병든 사람,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존재들.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쉽게 '제거해도 되는 위험목'처럼 대하고 있는가. 고사목이 하늘다람쥐의 집이 되듯, 어떤 존재의 '쓸모없음'은 다른 존재에게는 삶의 조건이 될 수 있다. 이 사실을 잊는 사회는 결국 스스로의 생태계를 빈곤하게 만든다.


하늘다람쥐는 최대 80미터를 난다. 그 이상은 날 수 없다. 이 한계는 결함이 아니라 그 종이 진화해온 조건 그 자체다. 그런데 인간은 도로를 놓고, 그 도로의 폭은 하늘다람쥐의 활공 거리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인간의 이동 속도와 하늘다람쥐의 활공 거리 사이에는 근본적인 비대칭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척도로 공간을 재편하면서, 다른 존재의 척도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종종 상상하지 못한다.


이 비대칭은 낯설지 않다. 네팔의 빙하가 감당해야 하는 온난화의 속도는, 그 온난화를 일으킨 산업국들의 배출 속도와 근본적으로 어긋나 있다. 도로의 폭이 하늘다람쥐의 활공 거리를 가볍게 뛰어넘듯, 부유한 나라들의 탄소 배출은 네팔이라는 나라 전체가 감당할 수 있는 기후 변화의 폭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책임을 만든 자의 척도와 피해를 견뎌야 하는 자의 척도가 이토록 어긋나 있다는 사실이다.


생태통로, 수관층 보존 같은 기술적 대안들은 물론 필요하고 옳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상상력이다. 우리와 다른 속도로, 다른 거리로,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상상력. 산림 개발 계획에 '생태적 연결성'을 의무적으로 평가하자는 제안의 진짜 의미는, 인간의 편의라는 단일한 척도로 세계를 설계하는 습관을 멈추자는 요청이다.


"그러니 하늘다람쥐를 보호합시다"  따위의 결론은 하늘다람쥐를 다시 한번 인간 행위의 대상으로, 우리가 베풀거나 거두어들일 수 있는 시혜의 객체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러니 네팔을 도웁시다"라는 문장역시 네팔을 시혜의 대상으로 만들 뿐, 배출하지 않은 자가 가장 먼저 무너진다는 구조 자체는 건드리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고 싶다. 우리는 연결이 끊기면 소멸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얼마나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우리는 쓸모를 다한 것들, 예를 들면 늙은 나무든, 늙은 사람이든,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은 것들을 얼마나 성급하게 지워왔는가. 우리는 우리와 다른 속도로 세상을 건너는 존재들을, 그리고 우리가 만든 위기를 가장 먼저 감당해야 하는 존재들을 위해 얼마만큼의 공간을 남겨두고 있는가.


밤하늘을 가르는 그 작은 활공은, 사실 아무것도 정복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끊어지지 않은 숲이 있는 한에서만 가능한, 조건부의 몸짓이다. 무너져 내린 히말라야의 빙하 아래 남겨진 삶들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하늘다람쥐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가 아니라, 연결되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의 삶에서도, 그리고 우리가 만든 위기의 책임에서도 인정하는 일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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