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 이름은' 포스터
역사는 기록되는 것인가, 아니면 기억되는 것인가. 한국 현대사의 가장 시린 상처인 제주 4.3 사건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이 질문과 대면한다. 지난 4월 15일 개봉한 정지영 감독의 신작 ‘내 이름은’은 그 질문에 대한 가장 뜨겁고도 정직한 응답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과거를 재연하는 스크린 속의 역사가 아니라, 스크린 밖 9778명의 후원자가 실명으로 이름을 올리며 완성한 ‘현재 진행형의 기억 투쟁’이다.
9778개의 이름, 멈추지 않는 엔딩 크레딧의 울림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객석에는 기묘한 정적이 흐른다. 통상적인 영화의 마침표가 아닌, 마치 장례식의 영결식이나 혹은 누군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는 진혼곡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1만여 명에 달하는 시민들의 이름이 한 글자씩 정성스럽게 스크린을 채우는 이 장관은, 그 자체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서사를 완성한다.
정지영 감독은 그간 ‘하얀 전쟁’,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를 통해 한국 사회의 금기를 깨뜨려왔다. 이번 ‘내 이름은’ 또한 상업적 투자가 거의 불가능한 소재라는 한계를 시민들의 크라우드 펀딩이라는 방식으로 정면 돌파했다. 9778명의 후원자가 제작추진위원이 되어 완성한 이 영화는, 더 이상 4.3이 특정 지역의 비극이나 금기된 역사가 아닌, 우리 모두의 기억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세대와 시대를 관통하는 ‘이름’의 서사
영화는 18세 소년 영옥(신우빈)과 그의 어머니 정순(염혜란)을 통해 1949년의 비극과 1998년의 현재를 교차시킨다. 촌스러운 자신의 이름을 콤플렉스로 느끼는 10대 소년과, 4.3의 트라우마로 9살 이전의 기억을 지워버린 어머니. 두 사람의 서사는 표면적으로는 세대 갈등과 성장을 다루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폭력의 대물림이라는 현대사의 거대한 그림자가 깔려 있다.
정순을 연기한 염혜란은 고요한 몸짓과 절제된 연기로 제주의 아픔을 체화한다. 특히 극 중 하이라이트인 보리밭 장면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몸짓은 단순한 무용이 아니다. 그것은 희생당한 영혼들을 향한 위로이자,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비극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영옥에게 어떻게 전이되고, 그것을 어떻게 다시 끊어내야 하는지에 대한 감독의 고민은 영화 곳곳에 녹아 있다.
논쟁과 토론,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
물론 관객들의 평가는 갈린다. 90년대 학원물과 같은 설정이나 캐릭터 간의 모호한 관계성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는 목소리도 분명 존재한다. 일부 관객은 “역사적 배경 설명이 부족해 사건이 감성적으로만 소비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이는 제주 4.3이라는 사건 자체가 가진 폭발적이고도 복잡한 층위 때문일 것이다.
제주 4.3은 단순히 일방적인 가해와 피해의 구도로만 설명할 수 없는 역사가 있다. 일제강점기에서 이어진 사회주의적 토대, 친일 경찰의 재기용, 미 군정의 개입 등은 이 사건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퍼즐들이다. 감독 역시 “확증 편향적인 영화가 되지 않기 위해 공부를 많이 했다”고 밝힌 것처럼, 이 영화는 정답을 주입하기보다 끊임없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 시절, 당신이라면 어떻게 살았을까?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 비극을 기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국가 폭력의 공소시효는 없다
개봉일에 맞춰 이재명 대통령이 시민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며 던진 메시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량 학살이나 잔혹한 행위의 배경에는 정치 권력이 있다. 권력의 이름으로 비호하거나 조장할 때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지적은, 4.3 사건이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에게도 유효한 경고임을 일깨운다. 특히 독일의 나치 범죄 처벌 사례를 들며 공소시효 폐지를 언급한 대목은, 우리가 이 사건을 어떤 태도로 기억해야 하는지 명확한 방향을 제시한다.
이 영화는 상업영화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결코 대중적인 재미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불편한 진실을 들여다보는 일, 잊혔던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일, 그것이 바로 영화가 존재하는 이유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기억하고, 이겨내고, 살아가는 것
‘내 이름은’은 영화관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시작해, 극장을 나서는 순간 관객들의 삶 속으로 확장된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이제 제주를 방문할 때, 그저 아름다운 풍경만을 보지 않을 것이다. 붉은 동백꽃이 흐드러진 들판 이면에 숨겨진 수많은 이름들을 떠올릴 것이다.
정지영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정답을 내리는 법정이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최소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데 성공했다. 비록 제한 상영과 이벤트형 배급이라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영화를 관람한 이들이 남기는 후기들은 그 자체로 작은 기억의 파편이 되어 4.3의 역사를 지탱하고 있다.
역사의 폭력은 비정했고, 세대를 지나며 이어진 상처는 깊었다. 그러나 그 상처를 인정하고 이름을 부르는 순간, 비극은 기억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이제 우리의 차례다. 영화를 보고, 공감하고,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 속에 새기는 것. 그 벅찬 연대가 계속되는 한, 제주 4.3은 결코 잊히지 않는 우리의 이름으로 남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몰라서도, 잊어서도 안 되는 나의 비극이자 우리의 역사, 그 이름들을 위해 지금 스크린 앞에 앉을 시간이다.
uapple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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